김형주 작가는 끝없이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태도, 그것이 자연에 얼마나 많은 폭압으로 가해지는지를 관찰하고 탐구한다.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흙에 반쯤 파묻혀 버려져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그것들을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해서 라벨을 떼어내고 깨끗하게 씻어서 배출한다. 문뜩 내용물이 다 씼겨져 투명하게 반짝이는 플라스틱 용기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백년 전 생활자기들은 이제 박물관에 놓여있다. 그것들은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소중한 사물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쉽게 버리는 수많은 플라스틱도 언젠가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되지 않겠는가. 플라스틱도 먼 훗날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면, 그렇게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물이라면, 우리가 플라스틱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인식의 전환이 자연을 향한 긍정적인 태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플라스틱을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자연훼손의 주범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플라스틱은 코끼리 상아나 동물의 뼈, 가죽 등의 대체물로 수많은 생명들을 구한 훌륭한 발명품이었다. 너무 저렴하고 흔하고 하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버린 우리의 태도로 자연은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을 향한 우리들의 이기적인 생각들을 찾아내어, 다시 한번 생각하고자 하는 방식만큼은 아직까지는 타협하고 싶지 않은 주제다.(김형주 작가 인터뷰 중에서)”
민지훈 작가는 자신의 일상에서 겪는 개인적 경험, 사소한 일상의 사건들 가운데서 갑자기 다가오는 물음들, 익숙하지만 낯선 순간들의 움직임을 기계적 움직임으로 대체하고 이를 재해석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과정’이다. 어떤 것이 출발하여 목적지에 도달하고, 다시 시작되어 반복되는 연쇄는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한 스펙타클하지 않다. 미미할 정도로 미세한 움직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일 수도 있다. 작가는 그것들이 갖는 과정의 순간들을 우리가 다시 주목할 수 있도록 기계적 움직임으로 시각화하여 그 의미를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을 한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동시대적 감각이라는 교집합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은 나의 미술 또한 삶에서 비롯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이 되길 희망하게 했다. 그리고 누군가 내 작업을 통해 공감과 위안을 얻는다면 작가로서 그 작업은 제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억지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금세 알아차리는 것처럼, 솔직하지 않은 이야기는 설득력에 한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작품 또한 작가의 경험이나 감정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작업을 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지켜내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민지훈작가 노트중에서)”
설수안 작가는 우리가 ‘그냥 보아 넘기는 것들’, 특히 자연에 행해지는 ‘이상한 행위’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들여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보아 넘기는 사건들, 행위들 속에 있는 이상함, 그 속에 담긴 아름다움이나 숨겨진 의미들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려 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순간순간에 깔려있는 느낌을 파악하려면 한참 쳐다봐야 한다. 은행나무를 ‘내가 사는 도시의 가로수’로 볼 때는, 그 가로수를 뽑는 것, 냄새가 나기 때문에 다른 곳에 옮겨 심는 것을 별일 아니게 보아넘길 수 있다. 암컷 은행나무만을 솎아내 뽑아내고 수컷 은행나무만을 남기는 이 괴이한 장면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자연의 한 존재라는 생각없이 그저 조경과 편의를 위해 심은 ‘서울의 가로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들여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참 서서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가로수를 옮겨 심는다’는 사건의 전말로만 파악하려는 태도가 사그라들 수 있도록, 우리는 느낌이 떠오를 때까지 한참 쳐다보아야 한다.(설수안 작가노트 중에서)”
양소정 작가는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관찰하고 찾아내어 그들의 거처를 만들어주는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질 것들을 향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 “나에게 작업이란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형상들 중 나의 세계에 불러들인 이미지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이미지의 외곽선을 다듬어 형태를 매만지고, 그들이 나아갈 회화의 표면을 정돈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매일의 과정들은 성실하게 쌓이며 점차 화면 위에 드러나는데 미세한 선의 방향이나 색의 중첩같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손의 움직임을 통해 여지없이 흔적이 되어 남는다. 작가는 이 모든 흔적에 책임이 있다. 가능한 모든 부분에 최선을 다하며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뭉뚱그리거나 얼버무리지 않겠다는 자세로 작업에 임한다. 이번 출품작은 사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추상적 형태에 관한 작업이다. 사라져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이나 주변의 영향에 의해 형태가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사물을 선택하였는데, 비록 무기력하거나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모양을 갖고 있는 존재들에게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양소정 작가노트 중에서)”
이은미 작가는 자신과 맺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유기적 관계에 대해 탐구한다. 일상의 어딘가에서 보았을 어떤 순간들은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면서 또 다른 장면으로 중첩되며 희미하게 서로 섞여든다. 작가는 시간, 바람, 빛과 같이 고유하면서도 어디에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유하고 포착하려 한다. “어떤 이미지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거나. 그 경계나 테두리들을 지우는 행위는 내 작업과정에서 지속되고 있다. 언제 어디에든 '빛'은 존재한다. 자연의 빛이건 인공의 빛이건. 빛은 호흡한다. 흐르기도 하고. 바람과 구름처럼 자기만의 호흡으로 빛을 받는 모든 대상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의 제목들도(어디선가 빛, 어둠이 온다, 둥근 흐름, 흐르는 빛과 같이) 서로 연결되어있다. 관계를 뚫고 가로지르며 스며들고 있다.(이은미 작가노트 중에서)”
정희정 작가는 스스로를 눈의 작가라고 표현한다.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적 자극과 꿈 사이를 탐구한다. 작가가 보여주는 숲의 이미지는 많은 이들이 꿈에서 한번 쯤 보았을 듯한 보편적인 세계이지만, 그 속에는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기괴하면서도 유니크한 사물들이 곳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이고, 누구든 노닐 수 있는 숲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도 들어선 적 없는 고유한 작가만의 공간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체성이란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나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꿈이다. 사랑이나 죽음이 온전히 나의 것인 것처럼 꿈도 타인과 함께 할 수 없는 내면적 장소이다. 눈을 뜨고 보는 풍경은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가지지만, 눈을 감으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풍경 속으로 되돌아간다. 내 안의 빈 공간으로서 꿈을 통해 의미와 감각 사이, 현실과 환상의 틈을 걸어가 보고자 한다.(정희정 작가노트 중에서)”
조인한 작가는 ‘기록하는 행위’의 힘을 보여준다. 그는 묵묵히 기록하는 행위 속에서 떠오르는 관계의 지점을 통해 작업세계를 확장한다. “기록의 행위와 나, 기록을 위해 필요한 것들, 기록 후에 만들어진 사물로서의 기록물 등의 단상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2012년부터 전국의 정월대보름 축제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정월대보름 축제의 핵심은 불인데 나무와 짚으로 만든 거대한 무더기를 태우는 달집 태우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 축제를 별다른 목적 없이 지속적으로 기록했다. 아주 개인적인 나들이처럼 때가 되면 가본 적이 없는 마을을 방문했고 준비하는 필름도 100피트 두 통만 가져갔다. 쌓여 가던 촬영분은 이후에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리서치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소설가 이기영과 연결되었다.(조인한 작가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