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환 개인전: milestone

김기환

milestone : 뒤돌아보듯 앞으로 ● 끝없이 이어진 길 한가운데 서 있다. 그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되지 않는다. 어느 곳이든, 얼마만큼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을까. 길은 하염없이 눈앞에 펼쳐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모퉁이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를 왔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감춰진 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유일하게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만이 의지할 수 있는 전부이다. 창작의 길에도 그런 이정표가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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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표라는 의미의 전시명 『milestone』은 이 전시를 이정표삼아 작가 김기환이 자신의 작업 여정을 확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는 긴 시간 작업을 해왔음에도 지금까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로 작업을 멈추었던 시간에도 단 한 번도 작가는 내면에서 작업에 대한 구상을 놓지 않았고 이제 그 시간에 대한 무게를 이기고 세상으로 나오려 한다.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갈무리하고 이것을 전환점으로 삼아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것이다. 자신의 온 길을 돌아보고 갈 길을 살펴보는 이정표를 스스로 세우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의 출발점이 되는 「IMAGE 1995」, 「IMAGE 1995-1」과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은 강한 색채의 선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마치 면처럼 보이는 굵은 가로선들은 속도감 있게 화면을 가르며 중첩된다. 이어지고 다시 분절되는 선적인 요소들의 운동성은 그 자체로 형상이 된다. 창작에 있어서의 고민과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떠올리며 작업하던 작가는 오히려 반대로 나이프를 이용해 과감하고 강렬한 화면을 완성했다. 내면의 심상과 감정의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결합한 이 작업은 의외로 경쾌하다. 이는 선명한 색상의 조화와 대비, 아래로 무겁게 처지는 것이 아니라 횡으로 질주하는 듯한 움직임 등의 형식적 요소에 의한다. 무거운 내용과 쾌활한 형식의 불일치는 작품에 대립과 운동에서 발생하는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시기의 마지막 작업에는 분토를 섞어 바름으로써 질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내고 질료의 실험적 몰두의 시작을 예고하기도 했다. ● 「IMAGE 2000」으로 넘어가면서 작가는 유화 물감의 질감에 더욱 집중한다. 본격적으로 이미지와 물질의 연관성을 탐구하면서 재료적 특성들에 천착하여 작업을 수행한다. 최초의 모티브인 기괴한 꿈은 그저 출발점에 불과하다. 우연적인 효과에 의지하여 다양한 색상들을 이용한, 실험적 욕구가 강하던 시기의 작업으로 오일 페인팅에 대한 탐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스며들 듯 바른 부분과 두껍게 얹은 부분의 대립, 불투명과 투명이 동시에 구현되는 작업은 유화 물감의 특성과 질감을 최대치로 드러낸다. 여기서 붓 터치는 좌우를 벗어나 종횡으로, 사방으로 자유분방하게 흐른다. 힘 있는 필치는 이전의 작품들과도 이어진다. 동시에 형상은 불규칙적으로 일그러진다. 이야기의 맥락과 서술은 뒤죽박죽이지만 그 기분만이 남겨진, 꿈을 꾸고 일어난 후 다음날의 아침 그 자체이다.

한동안의 공백기 이후 작업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 작가는 작업에 제목을 붙인다. 동시에 작업에서 색채는 완벽히 제거된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큰 변화를 내보이는 것이다. 「새벽 5시 10분」(2009), 「끓어 넘친 냄비」(2010), 「비극적 세레모니」(2018)로 이어지는 세 작품은 모노크롬과 혼합 질료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시멘트와 먹물, 물감을 혼합함으로써 작가는 본격적으로 질료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두꺼운 질감과 흘러내려 굳은 시멘트, 선명하던 색상의 부재, 정제된 형태 등 이전의 작품과의 유사성은 한결 옅어진다. 화면에서 매끄러움과 울퉁불퉁함이 서로 대비되고 느리게 흘러 굳은 시멘트는 재빠르게 스쳐간 붓질과 상응한다. 반질하게 빛을 반사하다가 온전히 빛을 빨아들이는 등 대립이 격렬하다. 형식에 있어서의 전환은 사실상 내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여정에 일어난 변화와 굴곡점들을 작품에 녹여내면서 자연스럽게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색상을 버리고 모노크롬 작업을 하게 된 이유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작업들에서 내용과 형식, 질료는 조화를 이룬다. 작가는 이전의 색들을 버리고 보다 어둡게 표현하고자 했으며 어떻게 하면 더 어둡게 그릴 것인지 고민하였고 시멘트라는 새로운 질료와 먹물의 선택을 통해 방법을 모색하였다. ● 「드로잉」 연작을 살펴보면 작가 김기환이 이미지 작업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가 잘 드러난다. 바로 형식에서의 조화와 균형이다. 생명의 태초의 시작점과 근원적 생명력을 여성의 자궁과 난소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드로잉 작업에서 작가는 무엇보다 시각적, 형식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맞추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지점은 작가의 전체 작업 저변에 동일하게 깔려 있다. 유화 물감의 특성을 끝까지 실험하기도 하고 새로운 질료를 도입하기도 하고 색감의 다양성을 추구하기도, 반대로 흑과 백으로의 단조로움을 이끌어내기도 했던 작가의 시도들.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은 바로 조화와 균형을 구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구이다. 동시에 작가는 일차원적인 조화와 균형을 넘어서 대립과 힘의 움직임까지 포괄하여 드러내는 단계에 도달한다. 이는 곧 형상과 표현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고자 하는 작가의 진지한 열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 김기환 작가의 작업은 길을 걷다 모퉁이를 도는 것처럼 여러 번 전환을 맞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작품의 형식과 질료가 변화한다. 화이트큐브에 들어오니 변화와 대비는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작가 김기환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색과 집중이다. 작가의 내면과 의식 속에 들끓어 오르는 이미지에 대한 강력한 추동은 작가를 계속해서 내몰았다. 이에 더해 내면의 이미지와 현시된 작품의 괴리,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합치는 작가가 계속해서 작가이게끔 하는, 멈출 수 없게 하는 강력한 자기 동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뒤로 걸을 수 없다. 멈추거나 그저 계속해서 앞으로만 걸을 뿐이다. 작가 김기환은 이제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내면의 이미지를 끌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멈춤 그 저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작업을 쉬었던 시간동안조차, 차마 의식은, 마음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멀리 떨어진 먼 곳을 헤매던 발걸음이 드디어 방향을 돌린다. 이정표를 확인하기 위한 이 자리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이다. 그 누구보다 지난한 시간의 무게를 가슴에 품고 돌아오는 일에는 더 많은 시간과 마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모든 무게를 담고 작가 김기환은 다시 발걸음을 뗀다. 제자리를 맴돌던 발걸음을 떼어 줄곧 품고 있던 그 곳으로 향한다. 개인의 역사에서, 작가 김기환의 작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그의 앞으로 길은 계속될 것이다. ■ 김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