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할 시간

이은미
희고 투명한 얼룩과 마주하기

이은미 개인전 : 도착할 시간
2023.04.12.-05.03.

늦여름의 바람에 일렁이던 나뭇잎들의 소리를 기억하는가. 나뭇가지를 스치던 바람이 몸에 닿았던 그때의 감촉을 기억하는가. 이은미 작가는 묻는다. 그때, 그 기억 속의 바람에 대해.

어느 계절의 바람이든, 그것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침잠하며 켜켜이 쌓이고 새겨지는 감정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부유하는 자유로움 그 자체이다.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바람은 우리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놓아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준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휘발되고 마는 지나감도 아니다. 바람은 높디 높은 곳으로, 넓디 넓은 곳으로 자유로이 부유하면서도, 세상 그 무엇보다도 깊고 내밀한 곳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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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이은미 작가는 초연하게 사라지면서도 또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바람을 기억할 때 공기의 일렁임을 떠올린다. 그때 눈을 감고 작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키는 숨이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미세한 진동을 일으킨다. 안쪽 깊은 곳에 닿는다.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무언가.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바깥에 존재했던 것들이 아니다. 언젠가 느꼈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감촉으로 그것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내 몸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있다가 조용히 피어오른다. 그리고 발견한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것을 느끼는 자신을. 그렇게 작가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 속에 서 있게 된다. 바람의 느낌이 이제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렁인다. 그리고 나지막한 위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스스로 만든 한계나 경계선 안에 머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모든 것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것은 어떤 아쉬움도 슬픔도 갖지 말고, 언제나처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서로에게 닿았던 순간을 기억해 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도착할 시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날도. 바람도 불었다. (그렇게) 여름은 지나갔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도) 매일매일, 그때의 색, 여러 말들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처럼) 짧은 시간”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어스름한 새벽녘 작가의 독백처럼 들린다. 이렇게 작가는 그것이 도착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검푸른 하늘과 맞닿은 나무 잎들을 스쳐 지나간다. 이번 전시 <도착할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향한 설레임과 함께 이미 정해져 버린 이별의 아쉬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의 느낌으로 충만하다. 작품마다 깃든 바람의 미묘한 뉘앙스는 자유로움이다. 그것은 희고도 투명한 얼룩처럼 이은미 작가의 작품들 곳곳에서 일렁인다.

희고 투명한 얼룩

이은미 작가는 지금까지 구석진 공간이나 모서리와 같은 경계의 공간들을 통해 공간이 대상과 비대상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보편적인 형태로 지시할 수 있는 사물들을 그려왔다. 작가가 주목했던 것은 사물과 공간의 관계성을 드러내주는 빛, 공기, 색을 통해 사물에 깃든 감정들, 함께한 시간과 기억의 편린들이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작가가 끊임없이 탐구해 온 것은 어떤 하나의 객체로 환원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흰 벽 위에 존재하는 희고 투명한 얼룩처럼, 언젠가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것’, 그것이다. 작가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어 왔다. 그리고 이제 사물, 공간처럼 어떤 경계를 가지고, 의미연관으로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이 경계로부터 한 걸음 내딛고자 한다.

작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이은미 작가는 이번 전시 <도착할 시간>에서 대상과 비대상의 경계를 포착하는 시선을 시공간으로 확장하고, 생성의 문제로 도약한다. 이를 위해 작가가 주목한 것은 바람, 햇살이 닿는 꽃, 나무, 들판, 숲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였다. 분명 자신이 마주한 대상이고,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그 모든 세계가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창발되는 느낌에 집중한다. 이제 작가는 안과 바깥, 절대적인 타자들과 가장 내밀한 것의 경계 자체가 무화되는 어떤 경험들, 기억들, 감정들을 화면에 옮기기 시작했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로부터 작가의 작업은 조금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이미 이전의 작업들을 통해 숨, 숨결에 주목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사물과 공간이라는 바깥 공간에서 생성되는 미세한 떨림을 관찰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미세한 떨림을 들이마시고 그것이 내 폐포 깊숙이 들어와 내밀한 곳과 접촉하며 일으키는 어떤 내부의 파열들을 감지한다. 작가가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대상들—그것이 사물이든 자연이든— 그것과의 접촉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그 오감의 감각보다 더 내밀한 곳에서 이루어졌음에 주목한다. 우리는 숨을 들이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나무를 스친 공기의 움직임, 바람을 내 안에 품을 수 있다. 내 몸을 둘러싼 피부를 통해 촉각적으로 느껴온 대상으로서의 사물, 자연을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그것을 호흡을 통해 내 앞에 품고, 더 깊이 폐포 점막에 이르는 감촉, 그 내밀하고도 깊은 접촉에 집중한다. 보이지 않는 대상이자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바람이 어떻게 내 안에서 내 자신이 되는지, 그 경이로운 순간들을 바라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더 이상 다른 사물에 빗대거나 기대어 표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생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으로 드러나는 순간처럼, 매 순간 생성되는 더없이 새로운 세계 그 자체이다. 이은미 작가가 기다리고 있는 세계, 그리고 마주할 수 있었던 세계는 ‘그렇게 있음(自然)’ 그 자체로 작가의 작품 속에, 그리고 지금, 여기에 동시에 존재한다. 숨을 들이 쉬고 내쉬는 공기의 흐름, 바람의 움직임 그대로 존재하는 그것들의 세계, 그것은 그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호흡들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다. ■ 박겸숙 (아트노이드178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