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렬 개인전: 박제된 시대

양경렬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 전혀 알지 못했다.’ 살면서 종종 느끼는 소회이다. 통상 인간의 삶은 관념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집단화된 관념은 관습 등 보편적인 삶의 양식으로 안정화된다. 안정화된 삶은 생활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잘 살고있다’는 효능감을 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삶의 일정한 패턴이 깨지는 일이 발생하면, 그간 믿고 따랐던 관념과 삶의 양태들을 한 차례 조정해야만 한다. 조정기는 짧지 않고, 지속하던 관념-삶의 운동은 방향을 잃는 듯 멍하게 정지한다.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 전혀 알지 못했다.’ 장기간의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현대인이 새삼 깨달은 관념-삶의 운동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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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이 ‘알지 못함’의 지점에 당도하였다고 해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식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감성 및 이성 능력에 따른 표상 활동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지만, 그런 자발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기-표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모든 것을 다 볼 것 같지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시야의 범위 내이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인식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아는 만큼 사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한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한계 너머의 세계를 동시에 상정하게 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경계 너머의 세계, 감각 활동이나 개념적 인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또 그것과는 무관한 어떤 하나의 세계, 그곳으로의 접근은 몸을 던지는 과감한 초월 경험을 요구한다.

2018년 전시 <플롯처럼 서사처럼>에서도 등장하였듯, 양경렬 작가의 작품에서는 상하 구도의 반사 이미지들이 주목된다. 반사라고는 하지만 거울 비추기식의 반영이 아닌 서로 다른 이미지들의 연접이 주이다. 물론 동일성을 담보하지 않는 이미지들이 상하 반전의 구도로 얽혀있다는 것만으로 반사 운동의 일관성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실상 작품 속 이미지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은 통상 이항 구도로 작동하는 관념 틀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위와 아래,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등 이항의 대립적 이미지들은 광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배치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성은 개인과 사회라는 관념 틀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이들은 단순 물리적 반영이 아닌 서로 다른 층위의 역사적, 심리적 반영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작품의 구도로서 표층, 작품의 서사로서 중층, 그리고 작품을 관장하는 의식으로서 심층의 구조를 형성한다. 각 층위의 이항 계기들은 상호 비춤의 주체들이다. 위는 아래를 비추고 아래는 위를 비춘다. 이곳은 저곳을 비추고 저곳은 이곳을 비춘다. 현재는 과거를 비추고 과거는 현재를 비춘다. 또한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비춘다. 이항 계기들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나 경계란 없다. 수천 년에 거쳐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너의 시선은 지금 이곳에서 나를 바라본다. 상하 반전의 작품은 시선과 인식의 틀 지움을 일깨우고, 느닷없는 속도로 소위 ‘경계’라는 것을 넘어선다.

이전 작품들이 이미지들을 특수한 구도와 다중적 층위로 배치함으로써 ‘경계 넘기’의 역사적 서사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면, 이번 전시 <박제된 시대>는 경계 자체의 미분 운동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전보다 질적인 운동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작가의 내적 침잠 혹은 구조나 형식적 틀 짓기 이전의 잠재적 차원이 자극된 결과로 보인다. 잠재 운동은 가능 운동과 달리 정해진 방향이나 구조를 향한 목적의식을 지니지 않는다. 힘을 뺀 열린 의식은 ‘묘한’ 중력 속에서 자유롭게 운동한다. 아니, 자유롭다는 말조차 한가하다. 그저 운동한다.

전시 제목 <박제된 시대>란 말은 이중적이다. 작품 자체가 시대를 박제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내적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 우리 사는 시대 자체가 박제된 채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비판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양경렬 작가는 이들 두 층위를 각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는다.

먼저 각각 90개의 조각과 72개의 조각으로 된 작품 ‘Stuffed Zeit’와 ‘generational boundaries’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어린이들과 테이블 주위에 서서 음식을 먹는 어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일상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었다가 작품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중심에 두는 것은 작가 자신의 느낌이다. 유년기와 장년기 인물들의 대비는 밝음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더욱 강조되고, 우리 시대 특유의 분위기를 떠올리도록 한다. 그 분위기와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모호함은 잠재 운동 일반의 특성이기도 한 것으로, 이는 명확한 경계를 획득하기 이전 단계의 이미지들을 함께 불러온다.

‘Stuffed Zeit’에서 주요 인물들을 배경으로 한 조각에서 시작된 형태 구성의 의지는 다음 조각으로 이어지려다 이내 멈추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완성된 시어가 아닌 한 묶음의 은유 다발이라 할 조각들이 분위기와 느낌의 모호함을 배가시킨다. ‘generational boundaries’에 그려진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의 의미론적 위상 역시 모호하다. 그들 아래 군중의 모습을 우리 시대의 상징물이라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운명을 관장하는 권력이 바로 그들임을 나타내기 위해 등장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어쩌면 삶의 어둠 속에서도 향연의 밤을 같이 나누고자 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호의를 표현한 것일지도. 그의 심상 속에 박제된 우리 시대는 정확히 어떤 느낌으로 기록되는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세상에 정확한 것은 없다. 느낌-운동의 모호함, 그 더듬거리며 침투하는 시각 운동을 즐길 수 있다면 잠재성의 언어를 터득한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연상케 하는 연작들은 ‘박제된 시대’란 말에 담긴 경직성을 깨고 나갈 우리 내면의 잠재력에 호소한다. 사회가 부여한 권력이나 관념이 빚어낸 역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왕관을 쓰고 있다. 물론 그는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 때로는 흐릿하고 때로는 비뚤어져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왕관을 쓰고 있는 한, 그는 단단해 보이는 권력의 다리를 간지럽힐 수도 있고, 어깨를 우습게 무너져 내리게도 한다. 물론 이 모두는 잠재성 차원이다. 왕관을 쓸지 벗을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잠재성 속에서 잠영하던 작가의 내적 운동은 ‘Open your mouth wide’ 시리즈에서 한 차례 새로운 방향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입을 크게 벌리고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하거나 특정한 배경을 뒤로 하고 고함을 치고 있는 인물들은 기실 우리 시대를 박제한 기록이자 증거이다. 그런데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그 느낌을 보자. 환호하는 웃음인지, 울부짖는 포효인지, 양자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은 잠재성 운동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또 다른 한편 이들에게서는 일종의 실존적 호소, 즉 다른 곳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다’는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기서 나는 ‘들린다’라고 하지 않고 ‘들리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감각적으로 온전히 수용되지도 않고, 따라서 온전한 개념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외치는 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 하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세계로의 진입은 몸을 던지는 과감한 초월 행위를 통해 달성된다. 각자 지닌 소리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상대의 소리가 자신의 몸을 통과하도록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잠영을 끝내고 살아있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어쩌면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초월 행위가 기대된다. ■ 임지연(미학의 집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