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인 개인전: 푸른 소요(騷擾)

송지인

푸른 소요 : 일렁임이 타오름으로 ● 제각각 자리한 손의 형상들. 『푸른 소요(騷擾)』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두 손을 기본으로 한, 다양하게 변주된 형상들은 발밑에 솟아오르듯 자리한다. 하나의 숲인 듯 하나의 정원인 듯도 하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움직이며 불쑥불쑥 오르내리는 정동情動처럼 제각각 흩어져 높낮이를 달리하고 있다. 관객은 그 정경 속을 산책하듯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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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신화적 서사에 주목하여 상상의 세계를 창조해냈던 작가 송지인은 이제 내면의 세계로 시선을 돌려 우리 각자가 내면의 품고 있던 이야기로 하나의 정원을, 세계를 구성한다. 내면의 풍경은 다양하게 일렁이는 혼란과 욕망, 고민과 상처를 반영한다. 외부 자극에 의해 '술렁거리듯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감정과 그 감정에 섞여드는 혼란, 그리고 이 둘을 응시하며 떠오르는 사유를 형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신체의 일부와 비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상징물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미 이종 결합을 통해 일상에 틈을 내는 방식으로 익숙함을 환기하고 새로운 서사를 부여해왔던 작가는 여전히 방법론적으로 이전 작업과의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송지인의 전시를 관통하는 것은 언제나 서사와 조형성이다. 다만 내면을 거닐며 건져 올린 서사 속 모양을 입지 않은 마음들을 그려내기 위해 보다 섬세하게 접근한다.

전시 제목과 동일한 제목의 『푸른 소요』는 스물아홉 점의 작품이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게 변주된, 일종의 기도로 보이는 형상 작업은 그 자체로 조형적인 쾌감을 일으킨다. 마주한 두 손 위로, 사이로, 또는 그 손을 감싸고 온갖 것들이 연결된다. 경쾌한 색상의 거품이 방울방울 달리고 날개가 돋아나 퍼덕이고 장미가 피고 가시덩쿨이 자라난다. 형벌을 받듯 밧줄로 꽁꽁 묶이고 차곡차곡 쌓은 돌멩이의 무게를 수행하듯 견딘다. 푸른 집을, 또는 어두운 터널을 품기도 하고 곳곳에 작은 불꽃을 틔우거나 전체가 거세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에 휩싸인다. 이렇듯 수많은 메타포와 상징을 품은 기도는 형태와 색과 질감의 다채로움으로 감각을 자극한다. 이 자극은 단순히 시각적 쾌감을 야기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곧이어 의미로 확장되어 개개인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이야기를 일깨운다. 푸르게 들끓듯 일렁이는 마음들, 그것들은 곧 개인들의 상처이자 염원이다. 오랫동안 깊은 곳에 품어온 마음의 서사들이 기도하는 손의 형상으로 전환되어 작가의 정원에 자리한다. 우리는 그 형상들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보게 된다. 마주하는 두 손 사이에 짙푸른 날갯짓이 무성하다. 소란스러운 듯 쾌활하게 파닥임은 누구의 꿈이고 바람인가.

우리는 이제 좀 더 정원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여기서 서사는 전환된다. 정원 한쪽에 가면을 쓴 소녀가 서 있다. 가면을 쓴 채 가만히 앞을 응시하는 도트 무늬 원피스 소녀. 또 다른 가면을 손에 꼭 쥐고 있다. 언제든지 가면을 바꿀 준비라도 한 듯이. 그 손의 미세한 떨림을 눈치챌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럴듯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들을 해나간다. 자신의 가면들을 능숙히 교체하면서,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면 깊숙이 자리한 아이가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독립적이고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가면 뒤로 조그마한 아이가, 미처 외면을 따라 성장하지 못한 아이가 숨어 있다. 내면의 스스로에게는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다. 가면들이 곧 자신의 얼굴이라 믿었던 소녀는 본래의 자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녀는 자신의 발 주변에 수많은 마스크를 떨군다. 외부에서 요구받았던, 또는 자신이 맞추려고 했던 역할들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남은 것이 본래의 자신이 아니라 텅 빔이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소녀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소녀는 어딘가로(「Somewhere」) 가버린 것인가.

여기 또 다른 소녀가 있다. 치맛자락이 흩날리고 다리는 공중에 떠 있으며 지금 당장 어딘가로 달리고 있는. 「유영」은 그 자체로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녀이다. 몸에서 연결된 작은 날개들은 소녀를 어딘가로 이끄는 듯도, 소녀를 따라 함께 달리는 듯도 하다. 소녀도 새들도 앞을 볼 수 없다. 욕망과 꿈에는 눈이 없다. 그저 마구 달려갈 뿐이다. 이렇게 특정한 방향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욕망에 이끌려 돌진하는 그 끝은 추락이다. 나는 듯 달리는 듯 혹은 배회하는 듯한 몸짓이 소녀의 치마와 몸에 그려진다. 어쩌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줄곧 그런 불안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맹목적인 이 발걸음 뒤에 무엇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이제 발걸음은 어둡고 조용한 곳,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른다. 동굴과 같은 작은 방에 숨기듯 자리 잡은 세 작품 「수집가」, 「버자이너 케이지」, 「붉은 미로」에는 자극에 대한 최초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이야기의 시원, 그 심원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제 몸에 잡아두고자 작은 걸이들을 가득 달고 있다. 녹아버리듯 일그러진 마음에서 반짝이는 구슬들이 굴러떨어진다. 바닥으로 흩어진 마음들은 서서히 빛을 잃는다. 관객은 가벼이 산책하듯 곳곳을 거닐다 이곳에 숨어들어 자신의 깊은 곳과 조우한다. 이곳에서는 그것이 크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 작가 송지인은 우리가 항상 불안해하고 초조하게 느껴왔던 심리적 불안, 상처를 건드린다. 우리는 자신 속의 어린아이를 숨기고 더없이 침착한 얼굴을 가장한다. 우리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처럼 군다. 누구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 그러나 잠시만 방심하면 곧바로 틈새로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에 흔들리고 만다. "곁을 지나는 푸른 찰나가 소리를 낸다. 그것은 향방 없는 검푸른 심연, 끝 모를 창공, 타오르는 불꽃으로 드러나 제 모습을 부순다(송지인)." 작가는 이 순간들을 발견하여 자신의 조형 세계로 끄집어낸다. 내면에 들끓는 욕망의 모습들과 순수한 기원의 마음을 포착한다. 마음의 일이기에 때로 이야기들은 두서없이 느껴지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각각 파편적인 단상들이 늘어선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전시 『푸른 소요』를 하나의 총체적 서사로 수렴시키려는 시도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손에 움켜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고 하나의 틀에 담으려고 해도 비어져 나오는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그렇기에 풍경을 거닐 듯 형상들 사이를 거닐도록 전시를 구상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어떤 해답과 위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그 사실을 못 본 척하지 않도록,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할 뿐이다. 세라믹 작업이 주는 표면의 질감과 서정적인 색감과 동시에 여전히 조금은 기괴한 조형성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작가 송지인이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방식이다. ■ 김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