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화이트

이희상
“아름다움의 배반”

이희상 개인전
2022.10.12.-11.01.

이희상 작가의 < 스노우 화이트 >는 대중적 서사로서 통속성과 상투성으로 특징하는 백설공주의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의 문화적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오래된 이야기가 시대마다 다양하게 새롭게 해석되고, 당대의 가치와 문화가 융합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작가는 < 스노우 화이트 > 시리즈를 통해 우리 시대에 잃어가고 있는 순수함과 친절함, 현재의 고난을 견디고 미래의 희망을 놓지 않는 정신을 다시 조명한다. 시들지 않는 조화 속에 파묻힌 늙지 않는 백설공주 인형과 문신을 한 백설공주, 부처와 눈을 마주하는 백설공주의 이미지를 통해 백설공주의 전통적인 이미지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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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문화는 2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유럽에서 어린이는 단지 몸이 작고 힘이 약한 사람일 뿐이었다. 어린이는 발명된 문화이고 아이디어이다. 그러므로 본래 ‘백설공주’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일 수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 ‘백설공주’는 최근 만들어진 ‘문화상품’으로 독일의 그림 형제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이야기를 한데 모아 우리에게 흥미로운 ‘백설공주(白雪公主, 독일어:Schneewittchen, 영어: Snow White)’로 편집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백설공주’는 1937년 디즈니사에서 제작한 애니매이션이다. 디즈니의 ‘백설공주’야 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백설공주’ 서사의 전통을 만들었다.

백설공주는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적인 ‘신화’적 서사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가 흐릿한 시대에 만들어진 백설공주라는 캐릭터는 분명한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서사이며 낙관적 인생관을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소녀의 성장과 정체성 찾기를 은유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모험담이다. 앨리스가 초현실적 환타지라면 백설공주는 스릴러 드라마이다. 왕자가 등장해 백설공주의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결말은 확실히 전근대적이다. 분명한 선과 악, 권선징악 등 중세적 인생관과 도덕관을 담고 있어서 우리에게는 공감이 떨어진다. 주인공 캐릭터로서도 예쁘고 착하기만 하고 독립적이지 못하며 타인에게 의존적이다. 모든 위기를 난쟁이들의 도움으로 해소한다. 실제로 20세기 이전 광산에는 체구가 작은 어린이들이 광산 노동자로 많이 동원되었다. 백설공주 속 난쟁이들은 사실은 어린이들이 모델인 것이다. 그러니 백설공주는 어린이(난쟁이)가 어린이(백설공주)를 돕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순수한 동심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의 주체로서 백설공주 보다도 난쟁이들의 삶의 지혜와 처신이 인간 본연의 순수한 윤리성을 은유하는 것은 아닐까. 이희상 작가의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는 난쟁이들이 알고 보면 백설공주 서사의 주제 의식을 이끄는 비중 있는 주인공들이다.

오늘날 백설공주가 겪는 다양한 경험과 위기의 극복은 새롭게 각색되며 현대 드라마로서 진화해 왔다. 소녀들은 자신의 왕자를 만날 때까지 어떤 고난이 와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긍정적인 인생관을 배울 수 있다. 순수하다거나 착하다는 미덕이 현대에 들어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백설공주는 그다지 매력적인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처음 보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잘 속아 넘어간다. 그림형제의 원작에 백설공주는 아버지인 왕의 사랑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어 여왕의 미움을 산다. 백설공주가 겪는 고난의 원인은 제공자는 바로 백설공주 자신이다. 서구 문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은유의 전통이 백설공주에서도 나타난다. 에덴 동산의 이브가 금단의 사과를 먹어 추방되었듯, 난쟁이들과 함께 안전하게 지내던 백설공주는 독사과를 먹고 죽음의 고통을 겪는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랑스럽고 한없이 친절한 백설공주의 이미지는 디즈니가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문화상품이다. 백설공주는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우연적이며 복잡한 사건과 사고가 벌어지는 진짜 세계를 겪어야하는 어린이(소녀)들의 성장의 과정을 긍정적인 결말로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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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상 작가의 <스노우 화이트>는 스토리텔링과 드라마와는 다른 전형적인 회화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백설공주와는 상관없는 사물과 이미지가 다른 맥락으로 구성된다. 작가의 모델이 된 백설공주 인형은 사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명랑한 신체 비율을 지니고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에 부합하는 형태의 공주 이미지를 구현해낸 공주 인형의 이미지다. 만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서 기본적으로 초현실적 캐릭터이다. 티없이 순수한 동심을 표상하는 크고 검은 눈동자를 한 백설공주 인형은 조화와 문신과 부처와 만난다. 진짜 꽃보다 더 화려한 가짜 꽃(造花)에 둘러싸인 백설공주 인형 시리즈는 마치 영원히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려고 몸부림쳤던 여왕의 욕망을 표현한 또 다른 버전과 같다. 관객이 그림 속 조화에 눈을 돌리는 사이 현실 속 수많은 백설공주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작가의 <스노우 화이트>는 다양한 형태와 구성으로 변주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가짜 꽃과 백설공주 인형으로 화면을 채운다. 백설공주를 감싸고 화면 전체에 그려진 꽃들은 너무도 정확하게 스스로 꽃임을 주장하고 있다. 조화는 일 년 내내 시들지 않는 꽃이다. 시들지 않는 꽃은 아름다움을 넘어 공포로 다가온다. 자연의 시간이 멈춘, 또는 시간을 거스르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더 비참한 불행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그림 형제의 원작에서는 왕비가 숲에서 꽃구경을 하는 사이 사냥꾼이 공주를 도망치게 한다. 작가의 작품 속 꽃은 비록 조화이지만 원작에서 꽃의 아름다움이 백설공주를 살리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쁜 그러나 죽은 조화도 무언가를 살리는 미덕으로 충만해진다.

백설공주는 검은 눈으로 정면에서 살짝 비껴난 지점을 바라본다. 관객의 눈을 바로 마주하지 않는다. 백설공주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을 피하고 있으며, 다른 지점을 바라봄으로써 관객과의 사이에 전통적인 긴장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럼에도 백설공주의 강렬한 검은 시선으로 인해 그림의 다른 부분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가고 흐릿해진다. 화면 전체는 채색과 붓질의 균일하며 기계적인 반복이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다. 일정한 깊이와 표현력으로 화면 전체가 균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마네킹과 같은 인위적인 분위기와 함께 인쇄한 이미지로 보인다. 백설공주의 피부와 옷의 질감과 조화, 눈동자와 입술과 여러 사물들의 물질적 특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 때문에 ‘스노우 화이트’라는 주인공과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진 신화적 서사는 마치 우리가 매일 접하는 데이터처럼 일상화되어 버린다. 작가의 화면은 깊이 없음의 평평한 이미지로 채워진다.

너무도 익숙하여 이제는 어떠한 신선함과 새로움, 놀라움과 흥미를 줄 수 없는 죽어버린 서사(백설공주)는 어떻게 새로운 경이로서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서사(백설공주)를 되살릴 왕자는 누구인가? 타인에 대한 순수한 또는 선입견 없는 판단과 배려는 어떤 결과를 낳는가? 백설공주의 편을 들어주고 도와줄 사랑하는 아버지와 친절한 사냥꾼과 난쟁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조화는 향이 없다. 시각의 즐거움에만 그 목적이 맞춰져 있다. 시각 중심 문화에서 조화는 가장 적합한 제품이다. 이 인공 자연으로서 조화는 결코 시들지 않음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백설공주 인형 또한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다. 영원히 14살의 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머물러 있다. 다양한 위기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노화를 극복하는 백설공주는 영웅이자 동시에 몬스터이다. 사실 공주는 스스로 공주가 되지 못한다. 부모가 왕과 왕비가 되어야 비로소 공주의 신분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공주라는 설정은 이미 백설공주가 본인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타인들의 욕망과 의지에 의해 존재하는 자를 은유한다. 부모와 왕자와 같은 타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조건의 백설공주는 오늘날 여성의 시각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존재이다. 어쩌면 작가는 살아있으나 거의 죽은 상태로만 존재하는 백설공주에 조화를 그려넣음으로써 조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문신을 한 백설공주를 통해 스스로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새로운 백설공주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부처와 눈싸움을 벌일 정도로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성장한 백설공주야 말로 작가가 희망하는 존재로 승화한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