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노 개인전: 캡맨, 푸가를 연주하다

기미노

기억/하기 ● '기억'은 언제든 '기억/하기'로서 '회상'이란 말로 읽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한다지만, 현재에 대응하지 않는 기억이란 없다. 과거를 현재에 다시 불러오는 동안, '투명한' 시간의 지층에 묻혀 있던 과거의 재료들이 춤을 추며 걸어 나온다. 아니, 날아오거나 기어오기도 하는 사물들. 신경회로를 통과한 사물들은 특유의 색을 지닌다. 어디 색 뿐이랴. 냄새와 소리와 촉감과 맛의 덩어리. '감각들의 모임' 외에 사물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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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은 킁킁대는 반짝임이다, 매끄럽게 입맛을 다시는 세계의 노래이다. 이상하게 들리는 문장이긴 하지만, 감각들의 경계란 본래 모호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도록 하자. 맛은 이미지를 불러오고, 감촉은 향기로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이 문장은 얼마든지 바꾸어도 좋다. 소리이든 이미지이든 촉감이든 맛이든 냄새이든, 이들은 언제나 '함께' 온다. '소리야, 너는 눈에게 가지는 말아라.' 감각들에 경계가 있다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문장도 자연스럽게 들릴 것이다. 감각들은 그저 '함께' 운동할 뿐이다. 경계를 알지 못하는 감각들의 지혜, 이들의 탁월한 공존 전략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Refuge / re­fug­(u)­e ● 기미노 작가의 개인전 『캡맨, 푸가를 연주하다』에서 우리는 '기억/하기'로서 감각들의 집합적 운동을 경험한다. 이는 하나의 시간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년기에서 날아오기 시작한 기억은 시간의 횡단선을 따라 현재의 끝에 매달린다. 그것은 물병을 타고 오기도 하고, 구름과 돌과 나뭇가지와 목화솜에 걸터앉기도 한다. 너희들, 그런데 왜 거기에 있니? ● 작품에 사용된 'Refuge(피신/쉼터)'라는 단어로 작가의 내면을 상상해 본다. 피신은 항상 '~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는 행위이다. 딱딱하게 굳은 두뇌가 똑똑한 척 소리친다. '아하, 고단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구나!' 말을 내뱉자 너무 식상하게 들린다는 걸 알아챈다. 사전을 펼쳤다 살피며 다시 말한다. '아하, 피신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자는 말이지?' 두뇌의 이런 말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두뇌야, 좀 더 운동해 보렴. ● 시간의 투명한 겹들을 뚫고 오는 동안 사물들은 변형되었다. 감각들 역시 확고한 자리 자리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감각'이 달라지면 '느낌'이 달라지고, 다른 느낌은 새로운 '감정'과 '정서'를 환기시킨다. '기억/하기'는 과거를 그대로 복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뭉쳐져 있는 감각들의 변화 작업이다. 회상을 통해 과거의 사물은 자기 변형을 겪는다. 기억 회로를 통과한 과거 한 시점의 한 사물이 작가의 사각 틀 안에서 여름날 오후 그림자처럼 시원하게 쉬고 있다. ● 'Refuge'란 말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물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 쉬려는 것일까? '때려잡자, 공산당!' 국민­학교 5학년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탕', '탕', 흑백 총성은 붉은 피를 쏟아낸다. '두두두두둑', 5월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속절없이 뭉개진다. 사물들을 피신시켜야 해, 감각들을 지켜내야 해. '~로부터'의 피신이라면, 그것은 '때려잡는' 자긍심으로부터, '붉은' 쏟아짐과 '철컥거리는' 뭉개짐으로부터의 벗어남일 것이다. ● 작가의 단어 'Refuge'를 파자해 본다. 철자를 이리저리 나누어 보다 're­fug­(u)­e'에서 생각이 멈춘다. 're­' 다시, 'fug­(u)­e' 푸가를 연주하라. 작가의 '기억/하기'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대위법(counterpoint)에 맞춰 푸가로 연주된다. 주제 파트에 응답하는 작가의 변주가 지쳐있던 몸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지', '반장하면서 내가 참 그런 일도 했어', '그때 그 여자 아이 얼굴이 어땠더라?' 이제 좀 행간에 바람이 불고, 사는 맛이 난다. 푸가가 딱딱하게 들린다면 재즈라 해도 무방하다. 어쩌면 재즈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형식이라도 엄격한 클래식보다는 프리한 재즈 스타일이 작가에게 더 잘 어울린다.

연필 ● 연필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이다. 그것은 얼핏 보아 단순한 표현 수단이다. 종이에 연필을 마찰시켜 무언가를 쓰거나 그릴 때, 일반적으로 특별한 경험을 한다는 생각을 갖긴 어렵다. 작가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살펴보자. 캡맨(capman:이번 전시 메인 캐릭터)은 연필로 그린 것이다. 크고 작은 점­면들이나 새­비행선 등도 모두 연필로 작업하였다. ● 작가는 종이 위에 짧은 선들을 반복적으로 그려 넣으며 면을 채운다. 누군가 그랬던가, 영토는 반복, 그것도 매우 '강렬한 반복'을 통해 획득된다고(가타리). 강렬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진하지 않은 H연필로 힘을 주지 않고 종이 표면을 짧게 터치하면서 채워가는 작가의 작업 과정은 강렬하기 보다는 지루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매우 강렬하다. '강렬한 반복'이라는 표현을 잘 살펴야 한다. 강렬함은 반복 활동이 도달한 독특한 질적 상태이다. 한 번의 터치는 약하고 흐리지만, 짧은 터치의 반복 속에서 강렬도가 생성된다. 힘을 좀 더 세게 주고 테두리를 한 번에 그리는 활동과 짧은 터치의 반복으로 면을 채우는 활동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형태를 그리는 것과 질감을 만드는 일. 형태는 명석 판명하지만 질감은 모호하고 혼연하다. 형태는 구분 속에서 자리 하지만 질감은 반복적 터치들의 중첩 속에서 형성된다. 최종적으로 형태는 질감에 잡아먹힌다. 연약함의 강함이여. 몸을 지닌 존재들의 서사가 그러하다. ● 캡맨이 웃는다. 강렬도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치명적 귀여움에 같이 따라 웃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은 쓸 데 없이 진지하다. 반성한다. 어려울 것 없다. 역시 힘 빼기가 중요하다. 작가가 들려주는 음악을 듣고, 작가가 보여주는 사물들을 보고, 작가에 다름 아닌 캡맨과 같이 웃고 떠들고, 날아다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미소와 웃음, 우리 삶에서 그것만큼 진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임지연

작가의 말 ● "자기 전에 졸지 말자." "사람은 평가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다." "코로나 이후의 사회적 적립이 어떻게 진행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바람은 이타적 관점의 적립이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 기미노 작가 노트 중 ■ 기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