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구 개인전: 7001번째 오크나무

한승구

이상적 균형점 ● 1 예술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우리의 현실, 사람들이 모여 이룬 집단, 사회를 마치 신체를 갖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처럼 다루곤 한다. 사회라는 관념이자 실체는 한승구 작가의 주제이다. 사회에서 나는, 사회가 없다면 개인은?

READ MORE

● 한승구 작가는 오랫동안 사회 속의 개인의 문제에 집중해 왔다. 작가는 2021년 3월부터 6월 중순까지 진행되는 LG시그니처 아트갤러리의 『별 많은 밤 지구를 걷다』 전시에 참여하면서 20세기 중후반 전설적인 독일의 다다이스트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의 프로젝트를 오마주했다. 한승구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팬데믹 이후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사회적 조각을 생각했던 요제프 보이스의 작 「7천 그루 오크 나무」는 전쟁과 산업화로 파괴된 독일의 자연환경을 재생하기 위해 도시 전체에 7천 그루 오크 나무를 심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1982년 7회 카셀도큐멘타에서 시작되어 1987년 8회 카셀도큐멘타에서 종료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는데, 요제프 보이스는 프로젝트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86년 사망한다. 1987년 카셀도큐멘타 개막식에서 그의 부인과 아들이 마지막 7천 번째 나무를 심으며 현대예술과 사회와 자연환경이 융합된 전설적인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 요제프 보이스의 시선은 마치 중앙아시아의 무당처럼 신과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는 세상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와 숲과 돌은 지구를 상징한다. 인간은 자연을 돌봄으로써 지구와 공존할 수 있다. 보이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예술활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행위가 예술로 그리고 예술가의 매우 중요한 표현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자연, 지구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보이스의 생각에는 모두 예술가들인 것이다. ● 한승구 작가는 이를 오마주해 서울시에 오크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작가는 카셀도큐멘타의 주 전시관 앞에 심은 오크나무와 현무암을 3D로 제작한 이미지와 구서울역 앞에 똑같이 제작하여 서로 마주보게 만들었다. 요제프 보이스가 고민하였던 문제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도시인 서울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은유하고 있다. 자연과 환경, 그리고 첨단사업화의 문명과 삶이 인류 모두와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보이스의 7001번째 오크나무를 서울역 앞에 심는다는 한승구 작가의 작업은 코로나로 인해 세계적인 위기에 봉착한 지금, 우리는 서울시가 안고 있는 도시화의 전형적인 파국적 미래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자 대안을 읽을 수 있다.

이번 작가의 요제프 보이스의 「7천 그루 오크 나무 오마주 작업 「7001번째 오크 나무」를 보면서, 우리는 한승구의 작업이 사회적 가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제들, 새로운 관계들로 시선이 옮겨갔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커다란 전환이 있다. 작가 자신으로 되돌아와 성찰의 과정이 중첩되는 것이 작업이 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고 보인다. 우리는 작가가 오랫동안 자신이 중심 주제였던 개인의 '사회적 가면'의 강화와 그 가면으로부터 벗어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게 된다. 개인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견고하게 내재화하던 사회적 가면을 둘러싼 사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로 성장한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가리던 가면을 벗자 세상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개인은 매일 매 순간 가면을 쓰고 벗는 연습을 한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과 사물을 만난다. 거기에 말랑말랑한 상태의 감각, 운동이 혼합된다. 억눌리고 답답한 현실은 활달하고 개방적인 삶으로 변모한다. ● 한승구 작가는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 관객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해 왔다. 그의 미디어기술을 활용한 작업은 완전한 문장 형태를 갖추기 전이거나 문장이 해체된 이후의 감각을 혼합하고 있어서 어떤 분명한 완전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시각과 청각 등 감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개념적 사유를 자극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체와 타자, 시선과 주체성의 문제 등 감각의 운동에서 개념의 운동으로 이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적 조형적 쾌감이 세계가 이미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고립된 개인과 개인들이 연결된 유기적 실체로서 사회의 관계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쉼 없이 개인과 다른 개인, 개별자와 집합의 관계를 시각화하고 경험하는 장치로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반향되는 존재와 사유의 거울로서 예술의 영역을 확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2 개인이 사회의 일원으로 안정적으로 안착하는 과정은 가까이 다가가 보면 한편의 거대 서사로 구성되어 보인다. 개인과 사회. 대결하고 화합하는 두 세계는 희로애락과 희비극, 성공과 실패 또는 좌절, 미숙과 성숙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이 거대한 서사 또는 스팩터클한 서사 속에서 예술이라는 사건이 등장한다. 작가는 보편적인 정답을 고안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의 관점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존재이다. 하나의 방향을 설정하고 좌우와 앞뒤, 위아래를 멀리 그리고 가까이 세밀히 살펴보고 생각하며 가끔은 주춤거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맹렬히 돌진하면서 나아가는 존재이다.

지난 시기 한승구 작가는 사회적 존재의 표상으로 인간의 얼굴을 주로 다양한 미디어 문법을 활용해 작업해왔다. 아마도 작가는 온라인의 사이버 세계와 오프라인의 현실 세계 사이를 갈등 없이 오고 가는 첫 세대일 것이다. 작가는 성장 과정을 보내며 컴퓨터와 온라인 미디어 세대의 감각을 체득했다. 마치 우리가 자의식을 갖기 전부터 쌀과 김치에 중독되듯 다양한 뉴미디어의 세대로 성장했다. 새로운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진화하며 세계를 변화시켜온 시대야말로 한승구 작가의 정신과 행동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독립적인 개별자이자 개인으로서 예술가라는 정체성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강박적 관찰과 사유가 작가의 작업 세계를 구성한다. ● 작가의 작업은 대체로 되돌아보고 자신이 속한 세계와 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회고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타자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자신을 허락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 문법 사이에 심미적 균열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기술과 공학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글수록 작가들은 보다 시적이고 심미적으로 변화한다. 완전하고 합리적인 존재에서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정의가 바뀌어 가면서 사회와 사회적 가면의 의미와 뉘앙스가 바뀌어 간다. 공학과 미학 사이를 왕복하는 작가는 예술과 자아의 문제가 당대 사회적 현실과 결합되어 생동하는 모습으로 제시하려 한다. ● 작가가 제시해온 설치작품들, 미디어 작업들은 작가 자신, 관객 한명 한명의 가장 개인적인 시선을 작품에 투영하고 반영한 후 경험하는 것들, 정서적 또는 의식적 피드백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연출한다. 작가에게 작업은 무수한 사물과 경험이 뭉쳐지고 풀어지는 과정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장소로서 작품은 동시에 독립된 개별자로서 개인이 형성되고 해체되는 장소이다. ● 이번 한승구 작가의 작업은 보편적인 문제와 개인의 비전이 혼융되어 있다. 우리는 인류가 걸어온 길을 반추하고 현재 인류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자연과 인간, 사회와 개인의 이상적 균형점, 개인의 해방과 궁극의 자유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¹ ■ 김노암

¹ 문명화 과정이란 인류가 인식한 결핍의 충족과정이다. 인류가 추구한 욕망의 결과이다. 욕망은 대상화를 통해 표현된다. 욕망의 대상 또는 어떤 대상을 욕망하는 것을 통해 욕망의 주체가 드러난다. 돌연변이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개인과 개인들의 모임인 집단은 결핍과 충족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이 욕망 그 자체는 아니지만, 예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활동, 힘과 관계는 분명 욕망과 관련이 있다. 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욕망을 줄이는 길과 욕망을 살살 어르고 달래는 것은 다르다. 예술은 후자의 길을 통해 어떤 균형점에 도달한다. 창작자와 매개자와 수용자의 삼각관계는 욕망의 힘들이 복잡하게 작용하며 모호하지만 분명히 우리의 사유와 행위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에너지 장을 만든다.